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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추앙한 군인이었지만… 시대만은 선택할 수 없었던 영웅
사**
|Views 155
|2022.06.09
기갑전의 귀재, 불행한 군인의 표상-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1차 대전서 저돌적 지휘로 놀라운 전과
전후 펴낸 보병 전술교리 불후의 명저
2차 대전 기갑부대 맡으며 천재성 두각
아프리카서 ‘널빤지 전차’로 영국 격퇴
많은 전공에도 본국 외면·정치에 환멸
전쟁 말기 히틀러 암살 연루 누명 자결
독일 기갑부대 지휘관 에르빈 롬멜(1891~1944)은 역사가 공인한 천재적인 군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연합국도 경외했던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지배하는 국가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그는 불행한 군인이었다.
1891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 출생한 롬멜은 항공기와 기계 공학에 관심을 가진 소년이었다. 롬멜은 항공 기술자를 꿈꾸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보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장교로 임관하자마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서부전선에서 롬멜은 저돌적인 지휘로 많은 공을 세우고,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1917년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된 롬멜은 카포레토 전투에서 1개 대대 병력으로 수천 명의 이탈리아군을 포로로 잡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 전투 후 롬멜은 귀족 출신 고위 장교들의 농간으로 자신의 전과가 왜곡되는 경험을 했다. 다음 전투의 공로로 ‘푸에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지만, 롬멜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겪은 부조리를 절대 잊지 않았다. 이 경험은 훗날 롬멜이 부사관과 초급 장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큰 자산이 되었다. 서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을 거친 롬멜은 보병 전술 교리를 정리해 출간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사관학교의 필수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육군에 남은 롬멜은 보병학교 교관으로 복무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경제 대공황으로 민심이 흔들리고, 사회는 혼란스러웠지만 롬멜은 군인의 기본적인 임무에 충실했다. 롬멜은 시위대에 실탄을 쏘라는 명령에도 물대포 진압을 고수하는 등 무분별한 살상과 폭력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히틀러 경호 부대에서 복무한 롬멜은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제7기갑부대장으로 승진했다.
어린 시절부터 기계에 관심이 높았던 롬멜은 기갑부대를 지휘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롬멜의 제7기갑부대는 어느 부대보다도 빠르게 진격했다. 롬멜의 부대는 ‘유령 부대’라는 호칭을 얻었고, 프랑스군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 아라스에서 영·프 연합군의 기갑부대와 마주친 롬멜은 공군이 운영하는 88㎜ 대공포를 대전차포로 변용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프랑스에서의 활약으로 명성이 높아졌지만, 그의 진가가 발휘된 곳은 아프리카 전선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영국군에 패한 동맹국 이탈리아가 지원을 요청하자 독일군은 당황했다. 소련을 침공한 상황에서 빼낼 수 있는 부대는 거의 없었다. 독일군 수뇌부는 롬멜이 지휘하는 소수 기갑부대를 아프리카로 파견하면서 현행 전선 유지를 목표로 삼았으나 롬멜은 북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영국군을 몰아냈다. 트럭에 나무 모형을 입혀서 전차로 위장하고, 차량에 끌개를 붙여 모래바람을 일으켜 착시 효과를 냈다. 영국군은 모래바람과 함께 나타난 ‘널빤지 전차’에 놀라 황급히 후퇴했다.
기갑부대 증원을 받은 롬멜은 1942년 여름, 북아프리카의 영국군 거점 토부룩을 점령했다. 롬멜은 직접 정찰기에 올라 적진을 정찰했고, 일선의 초급 장교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요구를 즉각 전술에 반영했다. 영국의 총리 처칠은 훗날 회고록에서 토부룩 함락 직후 전쟁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고 술회했다.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은 롬멜은 연합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활약에도 독일은 롬멜에게 효과적인 지원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군수물자가 소련 전선에 집중되었고, 지중해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한 영국군은 독일 수송선을 계속 격침했다. 북아프리카의 독일군은 만성적인 보급 부족에 시달렸다. 1942년 10월, 부상이 악화한 롬멜이 본국으로 송환된 사이 독일군은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군에게 일격을 당했다. 롬멜은 급히 북아프리카로 향했으나, 보급 없이 전황을 바꿀 수 없었다. 엘 알라메인 패배 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도 패배했다. 1943년 초에 롬멜은 귀환 명령을 받았고, 22만 명에 달하는 북아프리카 전선의 독일군은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때부터 롬멜은 전쟁, 히틀러, 나치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히틀러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았다.
1944년, 롬멜은 프랑스 해안 방비를 강화하는 역할을 맡은 B집단군에 배속되었다. 처음에는 대서양 해안방어시설 건설에 회의적이었던 롬멜은 열성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롬멜은 연합군의 공수부대를 요격하고, 지상군 본진이 상륙하는 순간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해안에서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탁월한 계획은 곧 반대에 부딪혔다.
기갑부대는 히틀러의 직접 명령에만 움직일 수 있었고, 롬멜의 상관들은 좀처럼 지휘권을 나누지 않으려고 애썼다. 롬멜은 1917년 이탈리아 카포레토 전투에서 겪은 전공 가로채기를 떠올리면서 질색했다. 1944년 6월, 아내의 생일을 맞아 귀국한 롬멜은 히틀러에게 직접 노르망디 지역의 기갑부대 지휘권을 요청하려고 했다. 롬멜이 자리를 비운 사이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북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롬멜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전선에 없었다.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44년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 등 일부 독일 장교들이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다. 히틀러는 대규모 색출작업을 벌여 암살 작전에 연루된 수천 명을 사형시켰다. 비밀경찰이 롬멜도 연루됐다고 보고하자 히틀러는 롬멜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롬멜은 당시 부상으로 입원 중이었기에 암살 작전 실행 사실을 몰랐지만, 광분한 히틀러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결국, 롬멜은 아내와 아들의 목숨을 보장한다는 조건 아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독일 정부는 국민적인 영웅인 롬멜이 암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감추고, 부상 악화로 인한 사망으로 발표했다.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고, 그의 유해는 고향 뷔르템베르크의 헤를링엔에 안장되었다. 롬멜의 사망 이후 전황은 극도로 나빠졌고, 독일은 예정된 파국을 맞이했다.
오늘날까지 롬멜은 많은 이들에게 추앙받는 군인으로 남았다. 롬멜은 귀족 출신 장교들과는 달리 늘 최전선에 나섰으며 포로와 민간인 학살을 막았다. 히틀러는 암살 계획에 연루된 롬멜을 살리고자 총통 관저로 초청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전쟁 말기 히틀러의 광기에 회의를 느낀 롬멜은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다. 롬멜은 군인의 본분에 충실했으나 시대를 스스로 택할 수 없었던 불행한 군인의 표본이었다.
1차 대전서 저돌적 지휘로 놀라운 전과
전후 펴낸 보병 전술교리 불후의 명저
2차 대전 기갑부대 맡으며 천재성 두각
아프리카서 ‘널빤지 전차’로 영국 격퇴
많은 전공에도 본국 외면·정치에 환멸
전쟁 말기 히틀러 암살 연루 누명 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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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기갑부대 지휘관 에르빈 롬멜(1891~1944)은 역사가 공인한 천재적인 군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연합국도 경외했던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지배하는 국가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그는 불행한 군인이었다.
1891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 출생한 롬멜은 항공기와 기계 공학에 관심을 가진 소년이었다. 롬멜은 항공 기술자를 꿈꾸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보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장교로 임관하자마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서부전선에서 롬멜은 저돌적인 지휘로 많은 공을 세우고,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1917년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된 롬멜은 카포레토 전투에서 1개 대대 병력으로 수천 명의 이탈리아군을 포로로 잡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 전투 후 롬멜은 귀족 출신 고위 장교들의 농간으로 자신의 전과가 왜곡되는 경험을 했다. 다음 전투의 공로로 ‘푸에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지만, 롬멜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겪은 부조리를 절대 잊지 않았다. 이 경험은 훗날 롬멜이 부사관과 초급 장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큰 자산이 되었다. 서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을 거친 롬멜은 보병 전술 교리를 정리해 출간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사관학교의 필수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육군에 남은 롬멜은 보병학교 교관으로 복무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경제 대공황으로 민심이 흔들리고, 사회는 혼란스러웠지만 롬멜은 군인의 기본적인 임무에 충실했다. 롬멜은 시위대에 실탄을 쏘라는 명령에도 물대포 진압을 고수하는 등 무분별한 살상과 폭력을 거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히틀러 경호 부대에서 복무한 롬멜은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제7기갑부대장으로 승진했다.
어린 시절부터 기계에 관심이 높았던 롬멜은 기갑부대를 지휘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롬멜의 제7기갑부대는 어느 부대보다도 빠르게 진격했다. 롬멜의 부대는 ‘유령 부대’라는 호칭을 얻었고, 프랑스군을 공황 상태로 몰아넣었다. 아라스에서 영·프 연합군의 기갑부대와 마주친 롬멜은 공군이 운영하는 88㎜ 대공포를 대전차포로 변용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프랑스에서의 활약으로 명성이 높아졌지만, 그의 진가가 발휘된 곳은 아프리카 전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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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영국군에 패한 동맹국 이탈리아가 지원을 요청하자 독일군은 당황했다. 소련을 침공한 상황에서 빼낼 수 있는 부대는 거의 없었다. 독일군 수뇌부는 롬멜이 지휘하는 소수 기갑부대를 아프리카로 파견하면서 현행 전선 유지를 목표로 삼았으나 롬멜은 북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영국군을 몰아냈다. 트럭에 나무 모형을 입혀서 전차로 위장하고, 차량에 끌개를 붙여 모래바람을 일으켜 착시 효과를 냈다. 영국군은 모래바람과 함께 나타난 ‘널빤지 전차’에 놀라 황급히 후퇴했다.
기갑부대 증원을 받은 롬멜은 1942년 여름, 북아프리카의 영국군 거점 토부룩을 점령했다. 롬멜은 직접 정찰기에 올라 적진을 정찰했고, 일선의 초급 장교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요구를 즉각 전술에 반영했다. 영국의 총리 처칠은 훗날 회고록에서 토부룩 함락 직후 전쟁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고 술회했다.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은 롬멜은 연합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활약에도 독일은 롬멜에게 효과적인 지원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군수물자가 소련 전선에 집중되었고, 지중해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한 영국군은 독일 수송선을 계속 격침했다. 북아프리카의 독일군은 만성적인 보급 부족에 시달렸다. 1942년 10월, 부상이 악화한 롬멜이 본국으로 송환된 사이 독일군은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군에게 일격을 당했다. 롬멜은 급히 북아프리카로 향했으나, 보급 없이 전황을 바꿀 수 없었다. 엘 알라메인 패배 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도 패배했다. 1943년 초에 롬멜은 귀환 명령을 받았고, 22만 명에 달하는 북아프리카 전선의 독일군은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때부터 롬멜은 전쟁, 히틀러, 나치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히틀러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았다.
1944년, 롬멜은 프랑스 해안 방비를 강화하는 역할을 맡은 B집단군에 배속되었다. 처음에는 대서양 해안방어시설 건설에 회의적이었던 롬멜은 열성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롬멜은 연합군의 공수부대를 요격하고, 지상군 본진이 상륙하는 순간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해안에서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탁월한 계획은 곧 반대에 부딪혔다.
기갑부대는 히틀러의 직접 명령에만 움직일 수 있었고, 롬멜의 상관들은 좀처럼 지휘권을 나누지 않으려고 애썼다. 롬멜은 1917년 이탈리아 카포레토 전투에서 겪은 전공 가로채기를 떠올리면서 질색했다. 1944년 6월, 아내의 생일을 맞아 귀국한 롬멜은 히틀러에게 직접 노르망디 지역의 기갑부대 지휘권을 요청하려고 했다. 롬멜이 자리를 비운 사이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북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롬멜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전선에 없었다.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44년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 등 일부 독일 장교들이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다. 히틀러는 대규모 색출작업을 벌여 암살 작전에 연루된 수천 명을 사형시켰다. 비밀경찰이 롬멜도 연루됐다고 보고하자 히틀러는 롬멜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롬멜은 당시 부상으로 입원 중이었기에 암살 작전 실행 사실을 몰랐지만, 광분한 히틀러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결국, 롬멜은 아내와 아들의 목숨을 보장한다는 조건 아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독일 정부는 국민적인 영웅인 롬멜이 암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감추고, 부상 악화로 인한 사망으로 발표했다.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고, 그의 유해는 고향 뷔르템베르크의 헤를링엔에 안장되었다. 롬멜의 사망 이후 전황은 극도로 나빠졌고, 독일은 예정된 파국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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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 롬멜은 많은 이들에게 추앙받는 군인으로 남았다. 롬멜은 귀족 출신 장교들과는 달리 늘 최전선에 나섰으며 포로와 민간인 학살을 막았다. 히틀러는 암살 계획에 연루된 롬멜을 살리고자 총통 관저로 초청했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전쟁 말기 히틀러의 광기에 회의를 느낀 롬멜은 기꺼이 죽음을 선택했다. 롬멜은 군인의 본분에 충실했으나 시대를 스스로 택할 수 없었던 불행한 군인의 표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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