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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삼일절.
박**
|Views 108
|2016.03.01
오늘은 삼일절입니다.
태극기를 달아놓은 집이 얼마 안되네요.
우리 로카피스 회원은 모두 달았겠지요.
휴일 즐겁게 보내세요.
♧김해 3·1운동 초석 다진 배동석 선생 ♧
김해는 국제도시다. 이 지역 6500곳이 넘는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8만 명에 달한다. 동상동 외국인 거리는 주말 많을 땐 3만 명이 오갈 정도로 북새통을 이뤄 이곳이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다. 하지만 한국인과 외국인 간 차별 없는 공존의 장이 된 이곳이 96년 전 선조의 항일독립 열망이 끓어 넘치던 저항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김해전통시장, 동상시장과 맞닿은 이곳 거리는 김해 3·1항일독립만세운동의 시발점이라는 점도 그렇다. 이 중심에는 애국지사 배동석(1891∼1924) 선생이 있었다. 김해중앙상가 아케이드 골목 끝 동상동 외국인 거리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휴대전화 대리점. 김해사람들 추억의 음식점이던 옛 &apos경화춘&apos 자리. 이곳에 배동석 선생 생가가 있었다.
배 선생은 김해장로교회(1894, 남한에 한국인이 스스로 세운 가장 오래된 교회)를 창립하고 김해합성초등학교(1907)를 설립한 배성두(1840∼1922) 선생 아들이다.
배 선생은 대구 계성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항일 의식이 강해 배일 혐의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목포에서 교직 생활을 하던 중 다시 배일 혐의로 체포됐으며 이후 상하이와 만주로 가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활동했다. 그러다 1918년 귀국한 선생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서울 3·1운동 학생단 대표로 활약하기에 이른다.
배동석 선생 생가 터. 지금은 휴대전화 대리점이 들어서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1889∼1981) 선생이 조선독립을 위한 경남지역 민족대표 추천을 위해 마산을 방문했다가 실패하자 이 지역 연고자로 파견한 이가 배 선생이었다. 배 선생은 1919년 2월 25일 마산에서 이상소·손덕우·이승규 선생 등을 만나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해 청원서에 연서로 날인할 뜻을 권유했다. 임무를 마친 배 선생은 서울로 돌아가 학생단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 김해로 돌아온 배 선생은 임학찬, 배덕수 선생 등과 은밀하게 의논해 김해면 3·1항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30일 밤 10시. 자신의 집과 인접한 김해면 중앙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배 선생과 동료는 미리 부산에서 파견돼 있던 일본군에 의해 검거됐다. 이것이 김해지역 최초 만세시위였다.
이날 만세시위 이후 김해군 가락면 대사리 허병(許炳) 선생이 최덕관·최계우·조병중·김석암·송세탁·송세희 선생 등과 함께 거사를 모의하고 김해장터(현 김해전통시장, 동상시장) 장날인 4월 2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날 오후 4시께 이들이 김해장터 십자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히 달려나가자 군중 60여 명이 호응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일본 헌병은 재향군인과 불량배까지 동원해 무자비한 폭력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송세탁과 송세희 선생이 크게 다쳤다. 허병 선생 등은 김해헌병분견소로 잡혀가 모진 탄압을 받았다.
태극기를 달아놓은 집이 얼마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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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는 국제도시다. 이 지역 6500곳이 넘는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8만 명에 달한다. 동상동 외국인 거리는 주말 많을 땐 3만 명이 오갈 정도로 북새통을 이뤄 이곳이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다. 하지만 한국인과 외국인 간 차별 없는 공존의 장이 된 이곳이 96년 전 선조의 항일독립 열망이 끓어 넘치던 저항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김해전통시장, 동상시장과 맞닿은 이곳 거리는 김해 3·1항일독립만세운동의 시발점이라는 점도 그렇다. 이 중심에는 애국지사 배동석(1891∼1924) 선생이 있었다. 김해중앙상가 아케이드 골목 끝 동상동 외국인 거리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휴대전화 대리점. 김해사람들 추억의 음식점이던 옛 &apos경화춘&apos 자리. 이곳에 배동석 선생 생가가 있었다.
배 선생은 김해장로교회(1894, 남한에 한국인이 스스로 세운 가장 오래된 교회)를 창립하고 김해합성초등학교(1907)를 설립한 배성두(1840∼1922) 선생 아들이다.
배 선생은 대구 계성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항일 의식이 강해 배일 혐의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목포에서 교직 생활을 하던 중 다시 배일 혐의로 체포됐으며 이후 상하이와 만주로 가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활동했다. 그러다 1918년 귀국한 선생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서울 3·1운동 학생단 대표로 활약하기에 이른다.
배동석 선생 생가 터. 지금은 휴대전화 대리점이 들어서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1889∼1981) 선생이 조선독립을 위한 경남지역 민족대표 추천을 위해 마산을 방문했다가 실패하자 이 지역 연고자로 파견한 이가 배 선생이었다. 배 선생은 1919년 2월 25일 마산에서 이상소·손덕우·이승규 선생 등을 만나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해 청원서에 연서로 날인할 뜻을 권유했다. 임무를 마친 배 선생은 서울로 돌아가 학생단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 김해로 돌아온 배 선생은 임학찬, 배덕수 선생 등과 은밀하게 의논해 김해면 3·1항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30일 밤 10시. 자신의 집과 인접한 김해면 중앙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배 선생과 동료는 미리 부산에서 파견돼 있던 일본군에 의해 검거됐다. 이것이 김해지역 최초 만세시위였다.
이날 만세시위 이후 김해군 가락면 대사리 허병(許炳) 선생이 최덕관·최계우·조병중·김석암·송세탁·송세희 선생 등과 함께 거사를 모의하고 김해장터(현 김해전통시장, 동상시장) 장날인 4월 2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날 오후 4시께 이들이 김해장터 십자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히 달려나가자 군중 60여 명이 호응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일본 헌병은 재향군인과 불량배까지 동원해 무자비한 폭력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송세탁과 송세희 선생이 크게 다쳤다. 허병 선생 등은 김해헌병분견소로 잡혀가 모진 탄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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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국 2016.03.01 14:44:39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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