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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이야기
제주도 "일주도로"와 "마라도"를 다녀와서!!
윤**
|Views 314
|2008.07.18
그러니까 1983년 1월1일은 대망은 한해가 밝았답니다.
그해 8월31일이면 제대를 하게 되는 게지요!!
국방부 시계는 잘도 돌아가서 제대의 날자가 오게 되는 것은 기정 사실 이지만 마지막 군대 생활을 제주도에서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답니다.
당시 관리 장교는 인사 장교를 겸직을 하고 있었기에 능히 가능 하리라고 믿고 제주도를 가게 해달라고 졸랐답니다.
이에 관리 장교는 "넌 임마, 군대를 놀러 왔냐?"라는 핀잔을 하였고 말년에 그곳에 가면 고참 대우도 못받는다며 그냥 여기에 조용히 있다가 제대를 하라고 설득을 했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단식"(군대에서 죽고 싶어서 "단식"을 해:간뎅이가 부었군:당시 관리장교의말!!!)을 하겠다고 맞섰고 제대가 6개월이 남으면 전출이 안된다는 애기를 했지만 계속 졸라 대니 관리 장교는 전출 명령장을 갖고 와서 "내가 졌다!! *만아 가거라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2월20일경에 전남 완도에 도착하여 "카페라호"를 타고 3시간30분만에 제주도를 갔답니다.
당시 2월 하순인데도 눈이 엄청히 왔지만 천천후인 카페리호는 묵묵히 잘도 출발하여 제주항에 도착을 했지요!!
제주도항에 도착을 했는데 텃세가 심한 해병대 헌병이 와서 어떻게나 지랄을 하는지 한동안 "입씨름"을 한끝에 그동안 싸이트에서 찍은 사진을 몽창 압수를 당하는 수모를 겪은후에 제주도 부두를 나올 수 가 있었답니다.
그러나 동서 남북을 분간 하기가 힘들었고 부대가 어느쪽인지도 모른채 지역 이름을 대면서 가까스로 마지막 시외 버스에 몸을 싢었지요!!
그렇게 하여 몇시간을 달려서 도착을 한곳이 "모슬포"(대정읍:사람들이 힘들어서 "못살포" 라고도함)였답니다.
이미 밤이 늦은 시간 인지라 지나 가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고 정문이 어딘지도 모른채 무조건 타워탑(레이다)만 보고 산으로 갔답니다.
많은 산비탈의 밭을 지나 초소를 보는 순간 "손들어~~"암호"는??"
전출을 오는 저로선 그날의 "암호"를 알리가 없고 큰소리로 "전출을 오는 321기 ** 입니다"라고 소리를 질렀지요!!
이윽고 초병은 정문으로 와야지 이곳으로 오면 어떡하느냐며 헌병이 있는 정문을 알려 주었고 그렇게 정문을 통하여 내무반에 들어간 시간이 새벽 1시가 되었답니다.
제대가 6개월이 남은 "왕고참"이 왔으니 "졸병" 들은 자다가 모두 벌떡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기가 바빴고 너무나 미안한 나머지 "너무 늦게 와서 미안 하다"며 신고는 내일 하고 빨리 그냥 자라고 했지요!!(물론 속으로는 졸병들이" ㅆ"을 연발 했겠지요:올려면 일찍 올것이지 잠을 깨웠다고 말이죠!! !!)
아무튼 내무반에 같은 보급 특기를 가진 안면 있는 동기생(후반기 특기 교육을 같이 받았음)이 한명이 있어서 겉으로나마 반갑게는 맞이 하여 주었지요!!!
이튿날에는 전에 같이 bx에 있었던 졸병도 만났고요!!!
그리고 매주 일요일이면 제주도를 돌아 다니기 시작을 했답니다.
그러다가 3월의 봄날이 되면서 "유채꽃"이 피기 시작 했을때 제주도 일주 도로 횡단을 싸이클로 "하이킹"을 하기로 했지요!!
제주시에 사는 졸병이 기꺼이 동참을 해주어 자전거는 보급 대장인 중위한테 빌리고 한대를 바깥에서 빌어서 돌기 시작을 했답니다.
제주도가 국내 지도를 보면 조그맣게 보여서 일주 도로가 약40~50km정도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계산을 대충 해보니 약 200km가 넘는듯 했답니다.
따라서 하루에 다돌아다니는 것을 포기를 하고 부대에서 토요일 오후에 출발을 하여 저녁에 제주시에 도착을 하였으며 제주시에 있는 금방 쓰러질것 같은 졸병들 집(제주도는 바람 때문인지 집의 처마가 매우 낮았음:방에도 키가 좀 큰 사람은 천장이 닿을 정도임)에서 하루를 자고 어머니가 해주는 아침밥(반찬은 달랑 2가지:묵은 김장 김치 포함)를 먹고 출발을 하여 만장굴(당시 안에까지는 가지 못했음)을 경유 하여 성산 일출봉이 있는 곳을 도착 하였고 이어서 서귀포시와 중문단지를 갔다가 안덕 계곡을 통하여 부대로 돌아 오는 강행군을 했답니다.(그후에 제주도는 신혼 여행을 갔을때 만장굴속과 성산 일출봉을 올라 가보았음)
그런가 하면 그해 6월 6일의 현충일에 최남단 "마라도"를 가기도 했는데 나올때 파도가 심하여 가까스로 배를 옮겨 탔던 기억이 난답니다.
그리고 거기 마라도에서 주민과 축구 시합을 당시에 50,000으로 걸고 내기를 했는데 축구에서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스코어를 지고 말았지요!!(에고!!!군인들이 쪽팔리게 "0"패를 했음: 마라도 남자 주민은 모두 악을 쓰고 태클을 걸며 덤비고 있었기에 말이죠!!)
여자들은 모두가 해녀 이기에 낮에 사람이 없었고 남자들만 몇명이 남아 있었으며 수도가 없는 관계로 빗물을 받아 놓고 그것을 걸러서 "음용수"로 사용하는것도 보았지요!!
그리고 연료는 말똥을 말려서 그것으로 땔감을 사용 하기도 했답니다.(지금은 가스도 들어고 모든게 "현대화"가 되어 있는것을 얼마전에 신문을 통하여 보았지요)
학교는 분교가 하나 있었는데 당시 학생은 10명 미만 이였고 학교 교사는 교장을 겸하여 교사가 달랑 한명이 있었지요!!
당시 낙시대를 가져 갔는데 순식간에 엄청히 큰 고기를 낚아서 서로가 박수를 치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하여 부대와 돌아와보니 어느새 얼굴은 빨갛게 타버리고 말았지요!!
그리고 얼마후에 관음사길로 한라산 "정상"을 졸병과 같이 올라 가기도 했답니다.
그때 당시에 동행을 해주었던 졸병을 5년전에 부산에서 만났는데 "군대 있을대 아주 잘해 주었던 우리 고참"이라고 아내와 같이 나와서 얼마나 융슝한 대접을 받았는지 정말 미안 하기만 했지요!!
그리고 몇년 동안은 아팠기에 전혀 만나지도 못했고 전화도 못했는데 이제 이렇게 간이식을 하여 살아 났으니 부산을 방문하여 졸병때 제주도에서 도와준 것을 오히려 내가 갚아야 할듯 하답니다.
그졸병은 334기인데 지금은 신용보증기금에서 차장으로 근무 중이라고 합니다.
근데 당시에도 허리가 굽은 노모였는데 그어머니가 88세 이신데 아직도 정정하게 생존하고 계신다고 하네요!!!
당시에 한라산의 1100고지에서 광주리로 "나물 장사"로 연명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때 졸병의 아버지는 중학교때 돌아 가셨기에 가정이 어려워져서 "제주 상고"를 들어 갔고 학교를 졸업후에 바로 "제주 은행"을 들어 갔다가 군에 입대를 하였답니다.
내가 그졸병한테 해준 것이라곤 집이 제주도 이기에 제주도로 발령을 내는데 관리 장교님한테 말을 하여 준것 밖에 없는데 말이죠!!!
아무튼 이제 하나 하나 갚아야 하는 시기가 온듯 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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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승영 2009.01.22 19:00:26 삭제모슬포 나도 하룻밤 지내보았는데(작전중)
김해에서c54타구 모슬포 완전히 신선들만 근무중♥♥♥
보급특긴가 김기정이란 동기덕에 자리돔회도
맛있게먹었든 기억이난넴♬♬♬ -
정재호 2008.08.02 22:29:25 삭제재미있는글 잘 읽고 갑니다..
글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네요~^^* -
홍석제 2008.07.21 09:58:57 삭제윤 석오 후배님 추억어린 이야기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계속 기억에 남고 추억어린 글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
황명학 2008.07.19 01:36:05 삭제선배님 글 하나하나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지나고나면 그때 그시절이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소중한 추억이야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십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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