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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이야기

6.25때의 나의 공군생활 수기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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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8


       1.4후퇴때의 그 여인과  나의 공군생활 수기   

 

1.4후퇴, 주위가 암울했던 그 시절 나는 친구  김o중과 남하에 의기 투합하여 같이 길을 떠났다 우리는 기차 뻐스 트럭등을 닥치는 데로 갈아타며 경남 마산에 도착했고 은사 방위장교를 찾아 구호병원의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우리 둘은 그곳 마산의 도립병원에 개설된 방위장병 구호병원에서 노역과 잡역을 구분 없이 닥치는데로 하며 숙식은 모두가 같이 병원 구내 뒤 숙소에서 하게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먼저 피난 와있던 엄형과 안형 두형을 만나 같은 방을 쓰게 되엇고 또  연상의 간호원 H양을 만났다 그녀의 집은 서대문 대현동 인데 그녀는 더 일찍 피란 온 처지이고 그녀와 같이 피란 온 그녀의 친구 김ㅇ난 간호원과, S 누나 이ㅇ숙 간호사(정규직)들과 형들은 객지서 만난 나를 동생처럼 친절하게 보살펴 주었다  아마도 전란중이라 정이 더 아쉽고 그리워서가 아니엇을까? 요즘 보다도 더 인간적이고 따뜻했던것 같다

 

그 때 그곳에 앞으로의 호구지책이 없어 딱해 보였던 최재ㅇ양이 잊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황해도애서 피란 나온 전직이 교사인 26세정도의 키도 조그맣고 얼굴도 미인꽈는 아니지만 몸매가 날씬하여 요즘 기준으로도 세련된 멋쟁이 아가씨다 가늘은 흰색 줄무늬가 있는 검정의 빤따롱처럼 넓은 바지에 하얀 깃과 소맷 동을 손수 만들어 붙인 브라우스 위에 검은색 털실 자켓을 걸친 그녀는 미인은 아니지만 매무새와 꾸밈새가 마음이 혹할 만큼 참 상큼해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가끔 찾아오는 엇 나간 친구를 호되게 꾸짖는 가 하면 유부남인 모지 지방기자가 유혹한다면서 그를 비난하며 불쾌해 하던 그녀의 반듯한 성품이 잊어지지 않는다


여자의 신문 배달이 귀했던 그 시절 손이 탄다며 얇은紗 장갑을 끼고 ㅇㅇ일보의 배달을 막 시작하는 걸 보며 나는 군에 입대하느라 떠났으나 지금은 80이 다 되었을 그녀의 뒷 소식이 참으로 궁금하다 잘은 몰으지만 친척 하나 없는 이 남녘 땅에서 격에 맞지 않게 갑자기 닥친 가난이 너무 안타까워 제발 성공적인 삶이었기를 기대하고 祈求하며 문득 문득 생각나서 잊지 못하는 여인이다

 

또 나와는 아무 말도 없었고 대화의 상대도 아니었던 어느 미스 ?, 나 보다는  연상일듯 한 그녀, 정작 내가 떠날 때에야 손수 수놓은 견장을 주며 "잘 다녀오세요......많은 말을 함축 한듯 한 눈 인사를 주었던....... 지금은 80은 되었을 얼굴이 어두어 보였던 군여고 출신의 미스 김! 내 생애에 첫 선물을 준  여성 미스 김! 그녀의 인상이 강하게 내 뇌리에 박혀있어 지금도 문득 문득 떠오른다 부디 편안하시고 다복하십시요 또 궁금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 80 이 다 되었을 두 형,서울공대를 다니다 왔다는 안형과 공무원을 하다 왔다는 엄형,  모두 소식이 궁금합니다

 

당시는 어떻게 하면 입에 풀칠을 할까가 절박한 시절이라 H양과는 3-4게월?을 사귀면서도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내 군에 갈 때 내 행장을 다 맡겼던 걸 보면 그녀에 의지하고 신뢰함이 컸었던 것 같다

 

병원도 이미 페쇄명령이 나 있어 解散이 임박한 처지이면서도 뒤늦게 합류한 우리 둘이 먼저 떠나게 되어 모두가 자신의 처지를 미리 보는 양 울먹 울먹 많은 위로와 격려를 먼저 받았다

나는 마침 공군사병 11기생의 모집이 있기에 단지 호구해결을 목적으로 호적이 두살이나 늦는걸 세살이나 올려써서 응시했다 시험장소는 마산 무학여고였다
시험날은 아마도 공휴일인 것 같은데 수학시험시간에 교복의 여학생 둘이 "피다고라스의 정리"를 푼 종이 쪽지를 복도 창쪽에 앉아 있는 나에게 조금 벌어진 문틈으로 [보이소! 보이소!] 작은 소리로 부르더니 눈이 마주치자 던져 주는 게 아닌가?  나도 다 아는 문제라서 도움은 되지 않았으나 전쟁을 치루고 있는 나라,  낯선 백사지 땅에서의 두 여학생의 친절한 마음씨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다,  지금은 70대 중반이 되었을 그 때의 그 무학여고생 두 분께도 행복하시기를 빈다, 

 

공군모집은 당시가 전쟁중이어서 비교적 생명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교사 직장인등 학력 높고 나이 든 지원자가 많았으며 사병 모집인데도 필기시험만이 아니라 영어회화 시험도 봤고 몇대 1인지는 기억 나지 않으나 대수가 높았던것 같으며 발표때는 떨어진 사람도 많았던 것 같다
  

 

그 해 5월경이던가 친구는 제 아버지 친구인 박모 대령을 찾아 해군사령부로 떠나겠다 하며 떠났고

나는 1951년 6월(11기) 마산의 집결장소에 모여 군용차로 경상북도 경산관내의 목조 단층에 교실 10여게의 조그마한 시골 초등학교인  자인(慈仁)초등학교에 설치된 임시 교육대에 도착하여 40 ? 일간의 신병교육에 들어갔다,

학교를 멀리서 에워 싸고 있는 산 준령에는 밤에는  공비들이 출몰한다 한다. 그런데 그 곳에는 경찰병력 5-6명의 경찰지서가 있을 뿐이고

군이라곤 우리 공군 신병교육대가 유일했다,

 

우리가 제일 처음 받은 훈련은 후퇴훈련이었다 비상 싸이렌이 울리면  1 미터 높이로 엉성하게 처진 철조망 울타리를 아무곳으로나 뛰쳐 나가 500미터 너머에 있는 저수지 옆 언덕 앞에 집결하면 대구로 후송한다는 것이다

 

 또 신병교육을 갖 시작한 어느 날 저녁 우리 신병교육생을 집합시키더니 총을 쏘아 본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 하여 99식 장총등 구식의 소총을 나눠주고

총 못 받은 신병에겐 노획한 중국(공)제 수류탄을 주며 허리에 차라 하고 부대 밖 3~4킬로의 산밑까지 가서 밤을 거의 새우며  외곽 경비를 서기도 했다

나는 동료 1인과 연락병이 되어 캄캄한 밤 길인데다 지형도 전혀 몰으는 길로  본대에 연락 다니느라 무척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밤에는 우리 교육대의 유일한 중무기인 기관총 1대를 운동장 가운데에 옮겨 놓고 기간 사병들이 밤새워 산을 향해 위협 사격을 해대어 잠을 편히 들 수가 없었다,

훈련이레야 요즘 TV 서 보는 가스체험 같은건 없었고 제식훈련뿐이었다 사격훈련은 뒤 저수지에 가서 이쪽서 저쪽으로 쏘았고  수류탄 투척도 동작으로만 익혔다

수도시설도 시원치 않아 식사당번들은 동내 우물에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떠올리며 씿었다,

 

목욕도 아마 개을이나 저수지에 가서 해결헸었는지 특별히 기억나질 않는다 기합도 세었다  

그리고 당시는 면회가 없었다 먹고살기가 바쁘고 교통편도 나빴으니 내 남 없이 엄두가 나지않아서였을 것이다 


 
군 입대후 몇 년 후다 당시는 군사열차가 없던 시절이라 市(도시)의 외곽 진 출입로에  駐留하는 헌병 검문소에 가서 기다리다 지나가는 트럭 특히 휼병감실(恤兵監室) 명판을 써붙이고 후생사업을 하는 트럭을 만나면 그 트럭이 가는 방향으로 가는 장병들이 짐 위에 올라 타고 가다가 갈림길에 닿으면 내려 다음차를 기약없이 기다리다 헌병의 협조하에 다음 오는  차에 환승 하여 가는 "리래이"식으로 환승하며 가야하는  불가피한 교통방식이었던 그런 시절이다

 

 그후에 RTO 라는 군인열차가 생겼고 큰 역마다 군인이 주류하는 RTO 사무실이 생겨 여행하는 장병들은 휴가증이나 외출증을 RTO 창구에 내 밀고 휴가증등 뒷면에 고무도장을 찍고 확인을 받아 열차에 승차하였다 요즘은 TMO 라 한다든가? 역에 TMO 창구가 보이지 않으니 시스탬이 바뀐듯하다
 

 

아므튼 당시는 전쟁기의 제도 미비로 군인도 일반인 처럼 기차표를 사야 기차를 탈수 있었던 시절이어서 가끔 내무반에서는 열차 차장과 호통을 치며 싸워 공짜로 기차를 탔다는 예기를 무용담 처럼 자랑삼던 시절이라 강능 전투비행전대에 있던 나는 대구 본대에 집결하여 서울로 전근가는 우리 일행은 공무출장증을 소지하고 당당히 대구역에서 기차에 승차할수 있어 무척 기분이 좋았던 생각이 난다 우리일행은 종착역인 영등포역에 내렸다

 

우리 일행은 마중 나온 부대의 트럭을 타고 노량진에 이르니 燈火가 管制되어 캄캄했다 트럭은 인도교 입구에서 한.미 헌병의 검문을 받고 캄캄한 다리를 통과하여 삼각지에 이르니 전기 불이 밝혀져 있다 기억이 애메하지만  이때 일반인의 한강 도강은 금지됬던 듯 하다

 

 우리는  연희대(당시의 이름)에 주둔한 한미 합동부대에 도착햇다

우리는 부대 선임하사로 부터 당장 내일 아침부터 미군들과 같이 식사를 하여야 하는데 조심하고 애치켓을 지켜 실수가 없도록하라는 사전 주의를 들었다

첫 외출 때 나는 H양의 집을 찾았다 집이 가까워 쉽게 찾았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정문에는 미군에 고용된 민간인이 보초를 섰으나 우리의 근무실 입구에는 미군 헌병이 상주하며 근무실 출입을 통제한다

그레서 근무실에 입실할 때에는 헌병에게 자기 명찰번호를 불러주고 명찰을 받아 좌측 앞가슴에 차고 들어가야 하고 퇴실 할때에는 그 명찰을 헌병에게 반납하여야 퇴실할수 있다. 그렇다고 출입이 부자유하거나 강제성은 없엇다, 어느 날 야근 땐 02~3시 쯤 맑은 공기라도 쏘으러 마당으로 나왔는데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인데도 서북쪽 하늘이 마치 저녁 놀 처럼 벌겋게 타는듯했고 멀리서 무거운 포소리가 "펑" "펑" 은은히 들려 나는 지금 실내서 전투를 하고 있는데 서부전선은 격전을 치루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며 나도 따라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우리부대의 식사는 미군과 같이 미군 트럭을 타고 이화여대(미군 식당)로 다녔는데 식당 입구에는 오랜지나 바나나 담배 껌 초코레트 콜게이트 치약등 일상용품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들은 오랜지 두 세 개씩을 "휠드 자켓"에 넣고 나와 추럭을 타고 부대(연희대)로 귀대하는데 도중은 우측으로 얕으막한 언덕 받이에 소형 목조건물 들이 드믄 드믄 있었고 지금 가늠 할 수는 없지만 지금 연대병원의 영안실 근처일듯 한 길가에 울담도 없는 허름한 기와집이 있었고 그 집엔 50여세 정도의 아버지와 17-8세의 딸 그리고 12새 정도의 남동생이 사는 게 보였다

 

 그 아가씨는 한가닥으로 땋은 머리에 시커멓게 때 쩔은 흰색 저고리와 검은색 광목의 짧은 통치마를 입었던 것이 서언하다 우리는 그 아가씨를 향해 매일 매회 그 집 마당에 오랜지 등을 다 꺼내 던져 주었다 나중에 들은 예기지만 그 집에선 그 오랜지를 내다 팔아 생활에 보태었다 들었다,

 
나는 나의 군생활 4년3개월중 중반기 약 2년여를 이 부대에서 근무했고 마즈막으로 전파관련 통신부대로 옮겼다가 6.25 휴전후 공군 첫 만기 전역대열에 끼어 1955.9 에 일등중사(요즘 하사?)로 제대하고 귀가했으나 거리엔 당시 손원일 국방장관명의의 "제대장병 직업보도"를 부탁하는 담화문 벽보가 거리 여기 저기 붙어 있을뿐 제대군인의 취직이란 꿈도 꿀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당시의 부대장이신 정보ㅇㅇ부대장 조ㅇ일 소령께 복직을 희망하는 편지를 띄었을까?

 

[용기를 갖고 살아보라]는 부대장님의 친절한 답글에 감사하며 공무원시험준비를 시작하여 장장 4년만에 기어히 시험에 합격 일반직 국가 4급직(요즘으로는 6급) 발령을 받았으니 모두 성공이라 축하해줬다,

그후 30여년간 一意 전심 직무에 충실하였던 덕으로 1급까지 승진하여 계급은 높어졌으나 財福은 없어 "고위공무원 재산공개"때도 꼬리를 맴돌았던 처지라 부끄럽게도 가난한 관리로 살다 1995.6월에 퇴임하여  복지관에 컴퓨터배우러도 다니고 노환도 치료 받으러 다니며 컴을 열고 왭서핑을 일상으로하며 살고 있다  


 첨언:

1 단락의 구분은 내용과는 무관하게 읽으시기 편하시게 자주 구분하였다

2 나이가 들면서 기억도 희미해지고 감성도 매 말라 글이 나오지 않는걸 告解하는 심정으로 1.4후퇴 때 만난 여인들에 포커스를 맞춰  그 고난의 시절을 회고해봤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 김진호 2010.11.29 12:56:32 삭제
    자 잃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2008.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