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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이야기

(옮김글)1952년도 한국전당시 우리아버지의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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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5

작성자 김홍선 작성일 2007-05-23 11:30:33
첨부파일 조회수 16 건
글제목 1952년도 한국전당시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
 

지금부터 저에 아버지의 아픈 사연을 글로 써보려고 합니다.


 신상명세 :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면 서호리 145 (별칭 태양산)에서 1934년 06월 11일 에 태어 나셨으며, 이름은 김 광(金光賢[280611-1148711]) 본명은 김 순 되십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1년 여를 강원도 둔내 라는 곳에서 가족 들이 피신하였다가 고향 태양산으로 돌아와 1952년 05경 까지는 고향 계셨으며, 당시에 고향에는 부모님과 형제(2남3녀중 2남)들이 모두 계셨으며 오래전 돌아가신 김 성(1895년 02월 13일생) 쓰시는 할아버지께서는, 고향에서 어선을 한척 갖고 계셨으며, 당시의 형편상 넉넉하지는 못하여도 항상 묵묵하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분이셨습니다.


다음은 전반적인 내용을 아버지의 회고를 듣고 본인이 글로 옮기는 것이기에 이해를 쉽게 하고자 아버지를 1인칭으로 하여 옮기겠습니다.


 -다음-

 때 는 내 나이 18세 쯤으로, 한국전쟁이 있고 2년후인 1952년 5월 경으로 기억을 한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나절에 어머니께서 ‘아버지 일이 늦으시니 순형이가 저녁을 갖다 드리고 오너라’ 하시어 식사를 들고는 아버지께로 달려갔다.

집앞 10리쯤에는 아버지 배가 있었고 아버지가 계신 배까지는 작은 쪽배를 노를 저어 가야만 했다. 멀리 뱃머리에서 그물을 수선 하시는 아버지가 보였다. 그날따라 반갑게 맞아주시는 아버지, 나는 식사만 드리고 돌아오려 하는데 ‘저녁 같이 먹고 늦으면 여기서 아버지와 같이 자자’ 하시고, 그날은 왜지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배 밑에는 작게 누울만한 공간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물때를 맞이하는 시간이 조금 남은터라 그곳에서 잠깐 졸았을까?.

 작게 쿵하는 소리와 함께 우당탕 배에 오르는 대 여섯명의 기척을 느끼는 순간 문이 열리고, 총부리를 겨누며 꼼짝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길로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들에게 이끌려 대하도라는 섬까지 나왔으며, 그곳은 고향에 그리 멀지 않은 섬이었다. 나는 어리둥절 잔뜩 겁만 먹고 있었지만,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동내 사람인 듯 아버지와 안면식을 나누고 있어서 약간은 안심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아버지 배를 이용하여 섬으로 갔으며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그길로 아버지와 나는 그들에게 이끌려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아마도 집에서는 그 같은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리라 생각 된다. 그때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하리란 생각을 못하였다. 하지만 그 뱃길이 마지막이었다.

 지금은 돌아 가셨을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와 생사조차도 짐작할 수 없는 누이들, 그립다. 아니  만나보고 싶어서 가슴까지 저리다.


 아버지가 집에 가기 힘들 것 같다고 하셨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 말로도 자신들을 알고 있기에 고향으로는 보내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아버지와 나는 그 곳에서 조금 남쪽에 있는 남포항 앞에 있는 초도라는 섬으로 왔으며, 그섬은 지금의 황해남도 앞바다에 섬이다.

 그 섬에는 몇몇 부대가 있었고, 나또한 생계를 위하여 부대에서 일을 하였다. 처음에는 위스키부대(당시에는 전부 그런식으로 불렀다)에 일을 하였지만 체구가 작은 나로써는 버티기 힘든 일이었다. 그 섬에서 그렇게 한달 여를 지내던 중 공군특무대에서 선원을 구한다고 하여 아버지는 선장 나는 선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초도라는 섬에서 보다 육지쪽에 가까이에 있는 주라도라는 섬으로 이동 하였다.


 그곳에는 허름한 집 몇 채와 20여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으며, 지금 기억으로는 공군특무대에서 현역군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던 것 같고, 방을 따로 쓰며, 수시로 무전연락을 하였고, 그것은 여의도 공군 비행장과 공군특무대 본부로 무전을 보낸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초도에서의 생활은 나름 데로 고생은 심하지 않았다. 식량도 미군들이 먹는 통조림 같은 것도 자주 먹을 수 있었고, 보급 되는 것 이 그래도 넉넉했던것 같다.

 그때 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사실에 다른 불안한 생각은 점차 줄어들었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그곳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 했다.

 하지만 위험하기는 했다. 거의 매일 바다 건너 인민군인 있는 지역에선 우리가 있는 초도에 포탄을 쏘았으며, 그럴 때면 밥을 먹다 말고도 숨고 하기를 반복하였다. 가끔 미군들이 보트로 식량을 날라 주었는데, 언젠가는 인민군이 쏜 포탄을 맞고 부상을 당항 미군이 황급히 되돌아 간적도 있었다. 그 정도로 위험 상황과 늘 같이 있었다.

 현역군이 무전을 치고 3,40분 후 면 비행기가 와서 인민군이 숨은쪽을 폭격하고 돌아간다. 그래도 거의 같은 곳에서 인민군들은 또다시 이쪽으로 포탄을 날렸고, 그런 것 이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수시로 남쪽에 있는 공군특무대(명칭은 정확하지 않지만 나중에 그곳에 갔었고 남산쪽에 있는 서울 경기동 이라는 기억과 공군특무대 라는 기억이 남아있다)에서 무전을 받고 북한에서의 첩보활동을 위해 수시로 북측을 드나들었다. 북한에서 쓰는 새돈을 잔뜩 들고 와서는 밤새 그돈을 헌돈으로 만들고, 북으로 올라갔다 또 다시 섬으로 나와 무전으로 연락하는 일들도 거의 매일 반복한다.

 언제나 한참새벽에 배가 움직인다. 아버지는 북으로 드나드는 공군특무대원을 북측 육지까지 이동시키는 선장 이었고, 나는 선원이었다. 동력선이 아니다 노를 저으며 천천히 움직이는 작은 배다 작은 소리에도 위험한 상황이기에 노자리에 물을 뿌려가며 이동하여야 한다. 그일은 힘들기도 하지만 정말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기에 아버지는 늘 무슨 이유를 만들어 나를 때어놓고 가려고 하셨지만 그리 쉬운것이 아니었다. 몇 번을 빼고는 항상 아버지와 같이 다녔다. 한번은 육지의 그늘에 가려 인민군 전투선을 지척거리에 두고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이 늘 계속 되었고 질멋하면 해어진다는 생각에 나는 아버지와 늘 같이 다니고 싶었다.


 특별한 일이 없을때, 가까운 곳에 나가 조개등을 잡아오기도 하였지만 그런 소일또한 당시에는 쉬운것이 아니었다. 육지에 조금만 가까우면 여지없이 총알이 날아들었고, 또 국군 비행기 또한 수시로 나타나기에 그날그날의 신호를 모르면 인민군 총알보다는 국군 비해기에서 쏘는 총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는 일중에 하루는 비행기 4대가 날아와 일부러 맞히지 않은 듯 바다를 향해 총알 4~5발을 쏘고는 빙빙 돌기에 아버지는 얼른 태극기를 뱃머리에 펼치고 배를 한바퀴 돌리시더니 이게 맞지? 하며 같이 온 사람에게 말하였고, 이네 비행기는 우리배 위에서 인사라도 하듯 날개를  두어번 기우뚱 하고는 가버린다. 그것이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 신호다.


그런 생활이 언 1년여가 지났을까?

어느 날 현역군이 북쪽으로 중공군이 몰려 내려온다며, 섬들까지도 위험하니 이제는 철수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날로 남으로 내려왔고, 앞에서 말한 서울 경기동(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이란 곳에 있는 공군특무대에로 갔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 갔으며 아마 그곳이 서울 남산이 맞는것 같다.

 거기서 20여일 묵었고, 어느날 높은 분인 듯 한분이 와서 우리와 같이 철수한 사람들을 차례로 불렀으며, 아버지와 나는 같이 들어가서 그 사람 앞에 앉았다. 그 사람은 그동안 수고했다며, 아버지는 이제 사회로 나가야 하고, 나한테는 공군에 남기를 원하면 그렇게 해주신다고 하셨지만, 나는 남쪽까지 와서 아버지와 떨어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아버지와 함께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분은 공군에서 선원으로 있었다는 증명서를 써주고는 큰 도장을 찍어 주고는, 조심하라는 짦은 인사와 함께 나가보라고 하였다.


 그길로 그곳을 나와서 아버지와 나는 수소문하여 고향 사람이 몇몇 있다는 충청도 광천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40여일을 묵으며, 아는분 집에서 그물도 손질해 주며 생활하였다.

 하지만 당시 사정으론 여러날을 그런 소일거리만 하고 남에게 신세 지기가 어려운 시절이라 아버지는 다시 인천으로 올라가기로 하고 그곳을 떠났다.


 지금도 아쉬운 일이 그때 있었다, 당시 공군특무대에 신분증으로 준 그 확인서를 인천으로 올라오는 길에 서산 어디쯤을 지날 때 만난 한 남자에게 빼앗기는 일이 생겼다.

 몇년전 국가보훈처에서 실시한 한국전쟁당시 참전한 민간군에게 보상을 한다고 하여, 신청을 받았고 신청자중 대부분이 약간의 확인 절차만으로 보상을 받고 있다고 알 고 있다.

 몇몇 아는 친구들은 그때 그렇게 신청하여 지금 보상을 받고 있지만 그보다 다른 사람의 소식을 알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 것이다.

 그때 나는 잃어버린 그 신분증이 없다면 보상을 해준다는 누군가에게 내가 격었던 일들을 구차하게 설명하고 그러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 기억들은 내가 격은 일들이고 누군가에게 사실을 알아달라며 구차하게 털어놓을 사소한 일이 아니기에 내자존심이 허락지를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후회스럽다. 그때 그렇게 라도 신청을 하였더라면, 그려면 지금쯤 가조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면 고향소식 이라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글은 제가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 본 것이고, 아버지의 기억에 남은 상황들을 최대한 옮겨보려고 하였으나 워낙 오래전 일들을 말씀하신 것이고, 나 또한 전문적인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당시의 모든 정황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경험하신 일들을 정확하게 옮기기에는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우리와 같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반민족자들과 그 후손들에게 그동안 막연히 품었던 나쁜 감정들, 이제는 자신 있게 그들을 나무랄 수 있다.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신 일들이 있지않은가?.

 아버지의 그런 사연을 옮길 수 있는것 만으로도 내 딸에게 자랑스럽다. 그리고 할아버지 와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감사합니다! 두 분 그리고 말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도 마다하지 않으신 당시의 그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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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초도에 있는 공군특무대에서 주라도(당시엔 주라리 라고도불렀다)라는 작은 섬까지 파견을 나와 선장과 선원으로써 1년 가까이 군 생활을 하신 것이다. 주라도에 있는 민간 첩보대원은 항상 무전병의 연락망에 따라 움직였다.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있는 대원들의 활동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사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경험하신 당시의 사실을 누군가에게 증빙할 필요가 생긴다면 매우 중요한 정황증거가 될 이야기다.


 다음은 당시 주라도 에서 실제 있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다른 대원들이 활동했던 내용이다.


- 다음-

1. 아버지는 배의 선원 역할 이외에 통신을 하는 현역군인의 무전기에 필요한 -양쪽에 핸들이 있고 두 손으로 돌리는- 발전기 돌리는 담당이셨다고 하셨다. 당시 아버지 나이가 가장 어려서 그랬을 것이다.


1. 육지에 상륙하고 섬으로 돌아오고, 북에 침투했던 대원들이 다시 돌아오고 할 때면 언제나 우리와 색깔이 있는 휘레쉬로 그날의 암호에 따라 신호를 교환하고는 배에 오르고 내리는 것이 가능 했다고 하셨다.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또한 칼빈총과 개인 무기를 항상 소지하고 계셨다.


1. 주라도 에는 미군이 보트로 식량 등을 보급하였다. 한번은 섬에 착륙하려던 미군 보트근체에 인민군 포탄이 떨어져 보급을 위해 나왔던 미군이 얼굴부위를 다쳤고, 이에 당황한 미군들은 보급을 중단하고 황급히 돌아간 적이 있었다고 하신다.


1. 인민군 위치가 확인되면 무전을 치고 비행기가 인민군 쪽으로 포격을 한다.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지만 비행기의 포격은 커다란 포탄이 먼저 떨어지고 바로 총격을 하면 포탄이 떨어진 근처는 불바다로 변하였지만, 항상 같은 위치에서 북한군이 또 나타났다고 하셨다. 날 좋은날 해질녘 이면 육지에서 주라도가 잘 보인다 그쯤이면  북한군이 주라도 쪽으로 포격을 하곤 했다고 하신다.


1. 어느 날은 북한화폐(당시엔 ‘적화’라고 불렀단다)를 잔뜩 가지고 왔다. 새 돈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북쪽에 침투하려면 헌 돈으로 만들어야 했기에 밤새 노름 등으로 헌 돈으로 만들고는 그것을 첩보원이 봇짐 속에 넣어 북으로 가지고 침투했다고 하셨다.


1. 북으로 침투했던 대원들이 한 젊은 노인과 모녀로 보이는 두 명의 여자를 데리고 왔서는 그 날로 노인은 보이지 않았고, 두 명의 여자들은 우리가 남으로 철수 할 때 까지 밥이며, 허드렛일들을 하였다고 한다. 그 젊은 노인은 속칭 ‘염장’인가 하는 사람이며 북한군편으로 국군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이 있었단다.


1. 북한에 침투한 대원들을 철수시키러 갔는데, 부상당한 미군과 그를 보살펴준 민간인을 데리고 왔다. 다행히 배에 다 탈수가 있었다. 미군은 끝까지 자신을 구해준 민간인의 손을 놓지 않았으며, 주라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초도로 후송되었다고 하셨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 미군은 소령으로 비행기 조종사이고, 초도에서도 곧바로 후송되었고 민간인도 같이 후송 되었다고 한다.


1. 첩보원들이 육지에 상륙하면 지금의 부비트렙처럼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양쪽으로 가느다란 선으로 연결하여 지나다가 다리로 건들면 터지는 폭탄이 있었단다. 가끔 대원들은 그것들의 뇌관만을 분해하여 가지고 돌아아서는 장난삼아 뇌관만을 터뜨리기도 했었는데, 노관만 터뜨리는 소리도 엄청나게 컷었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위의 몇 가지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몇 가지 이야기만으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민간인으로써 공군특무대의 주라도 파견지에서 근무하셨던 선장과 선원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 아버지께서는 보상에 대하여는 크게 개념치 않으신다고 하시지만 내 생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당시에 그와 같은 수많은 사연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한 일을 하신 분들은 당연히 보상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고, 그렇게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민간신분의 군인들에게 당사자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국가에서는  마땅히 그러한 분들을 찾아서-그분들을 찾고자 한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된다-, 2007년 현재를 사는 모든 국민들을 대신하여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여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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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을 읽어보신 공군전우회원꼐서는 당시의 관련된 사연이나 당사자를 알고 계신다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당시 &apos초도&apos 파견 대장이셨던 김승우 중위님을 찾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찾아 뵐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