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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이야기

"북파"<26>가짜 독일 간호사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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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2


광부 훈련소장에서 독일 간호사로

1970년 1월, 아내가 독일로 떠나고 3개월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노동청 소속 한국 해외개발공사는 외화 획득의 수단으로 서부독일 정부에 광부를 송출하기로 협약을 체결했다. 그에 따라 노동청에서 서독 광부들을 파송했는데 막상 진짜 광부는 얼마 되지 않고 가짜 광부가 너무 많았다.
당시는 대학을 나오고 놀고먹는 건달들뿐만 아니라 싸움질이 전문인 주먹들도 많은 시대였다. 이런 사람들이 서독에 가서 광부 출신이라고 하니 서독 광산 측에서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부는 단기 숙련공이라도 만들 요량으로 광부로 가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3개월 동안 탄광지대가 있는 광산지대 황지와 도계 광업소에서 석탄을 캐는 일을 하게 했다. 아무리 초보자라도 직접 광산에서 실습을 받고 훈련을 마치면 서독 광부로 보내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당시는 외국에 한번 나가는 것이 무슨 벼슬을 하는 것처럼 대단한 일로 생각하던 때였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루프트한자 독일 항공 비행기 티켓만 주머니에 꽂고 술집에 나타나면 외상도 주었다.
이렇게 특별한(?) 광부 훈련생들이 탄광지대에 내려오자 강원도 태백 탄전 지역 건달들과 자꾸 싸움이 붙었다. 여자 문제를 일으키지 않나, 아니면 음식을 먹고 돈을 내지 않기도하고, 하여튼 유명한 건달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다른 지역에서 소란을 피우니 어떻게든 민폐를 방지해야 했다. 그 방안의 일환으로 탄전지대에서 주먹깨나 쓰고 영향력 있는 사람을 물색하게 되었는데 내가 적임자로 뽑히게 되었다. 나는 특채로 뽑혀 노동청 해외개발공사의 도계 및 황지 광부 담당 훈련소장이 되었다.
훈련생들은 한 번에 150명씩 도계역에 도착했다. 그들을 인수하러 역전에 나가면 그야말로 꼴불견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어깨에 자일을 메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광부 훈련을 받겠다고 온 사람이 무엇에 쓰려고 자일을 가지고 왔냐고 물었더니 취미가 등산인데 주말에는 설악산에 가서 등반을 할 거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정신상태가 엉망인 사람들을 나는 실미도 특수부대 요원들 다루듯 스파르타식으로 교육을 했다.
민간인 신분이지만 기합도 주고 거세게 다루니 처음에는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내 출신 신분을 알고는, 또 자칫 한번 눈 밖에 나면 서독에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순순히 내 말에 잘 따랐다. 이런 호된 교육을 받아야 외국으로 나갈 수 있었으며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분파였던 나는 교육생들이 말을 잘 들어 기분이 좋으면 3개월 교육과정을 한 달 만에 수료해 주어 서울로 보내기도 했다.
어느덧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는 내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정말 멋있게 훈련을 시켰다. 그토록 엉망이었던 사람들을 3년 이상 광산에서 일한 광부같이 만들어 서독으로 보냈던 것이다.
1972년 10월, 서독 시립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아내는 한국을 떠난 지 2년 만에 부인과 수술실 책임자인 박사로부터 일 잘하고 근면하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무렵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는데, 그것은 시립병원 원장으로부터 내가 서독 병원에 취업되어 갈 수 있는 초청장을 받게 된 것이었다.
어느 날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남자 보조 간호사 면허증을 만들 수 있느냐고.
‘남자 보조 간호사…….’
당시 한국에는 남자 보조 간호사 제도가 없었다. 아내는 몸이 달았다. 외국에는 다 있는데, 그것 하나 만들 수 없냐고 재촉했다. 당시야 마음만 먹으면 도장 하나 파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가짜 간호 보조사 졸업장을 한 장 만들어 보냈다.
그런데 독일에 도착하고 보니 큰 문제가 있었다. 시립병원에 도착하는 날부터 외과 수술실의 남자 보조 간호사로 일을 해야 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까지 병원에 환자로라도 입원한 적이 없었는데 수술실 근무라니!
명색이 간호사인데 모른다고 하면 간호사 자격이 없는 것이 되고 또 가짜가 판명 나면 추방을 당하게 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북파요원 출신답게 진짜 간호사처럼 행세해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당시는 독일에 개별적으로 취업을 못 하던 시절인데 우리 부부는 아들 동석이와 신이도 초청해 와서 한데 모여 살게 되었다.
아이들 둘(큰놈 10세, 작은놈 7세)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같은 또래라도 한국 아이들은 덩치가 작아 덩치 큰 독일 또래들에게 놀림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그들은 눈을 치켜올리면서 “칭창총!” 하며 중국 사람 흉내를 내며 놀렸다. 독일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아니, 아버지인 나는 남을 때리고 살아왔는데, 임마, 너희들은 만날 얻어터지고 그 모양이야!”
나는 얻어맞아 풀이 죽어 집으로 들어오는 자식들을 감싸주지는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혼을 냈다. 그리고는 그들을 꼭 품고 함께 울었다. 애들도 울고 나도 울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이들에게 선포를 했다.
“앞으로 얻어터지고 들어오면 무조건 아버지가 너희들을 팰 것이다. 그 대신 패고 들어오면 고소가 들어오든지 치료비를 물든지 내가 다 부담하겠다. 그러니 오늘부터 학교공부 끝나면 무조건 두 시간씩 운동을 해야 한다.”
그날부터 아이들은 바로 운동을 시작했다. 한 시간은 내가 태권도를 가르치고 한 시간은 아예 유도학교를 보냈다. 그런데 운동을 가르친 지 6개월 후부터 두 형제가 교대로 또래들을 패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학교가 발칵 뒤집히고 학부모들의 원성이 대단했지만 당시 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이었기에 그것이 오히려 신이 났다. 치료비에 많은 돈이 들어갔지만 대신 힘센 우리 아들들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지금도 이따금 아이들은 나를 놀린다. 아버지가 목사되기 전에 애들 패고 오라고 운동 가르쳤다고……. 그때마다 쥐구멍이 있으면 쏙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얼굴이 간지럽다. 모두 다 이국 땅에서의 나그네 설움에서 나온 일화다.
그렇게 독일에서 5년을 살았다.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하루를 살아도 남자답게 살고 싶다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한국 남자의 기질이 발동한 것이다. 아내는 정식 간호사였기에 나보다 월급이 배나 더 많고, 수술실 간호사이다 보니 시간외 수당이 많았다. 나는 월급이 아내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아내보다 더 많이 벌고 싶고, 돈다발을 가지고 와서 방바닥에 팍 던져 놓고 큰소리도 뻥뻥 치고 싶은데 독일에서 사는 한 그게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당시 나는 5년, 아내는 7년 동안 알뜰살뜰 살림을 꾸려 모은 돈이 꽤 되었다. 그 돈을 다 가지고 한국에 나오면 행복하게 잘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절대 한국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이제 마음잡고 사는데 한국에 나가면 또 옛날로 돌아간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결국 조건을 걸었다. 미국에 이민 신청을 하되 만약 1년 내에 못 가면 한국으로 가자고 말이다. 얼마 후 간호사 이민 신청을 했는데, 6개월 만에 영주권을 받게 되었고 우리 가족은 미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 임태수 2013.12.13 09:33:49 삭제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