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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이야기

"북파"<25>탄광 주먹에서 크리스챤으로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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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5

제2부
탄광 주먹에서 선교를 꿈꾸는 크리스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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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독일행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군생활 동안 나는 위험한 작전을 수없이 치르고 수없이 많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런데 5년 6개월 만에 사회에 나와 보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특수부대 출신들은 그 기질이 특이해서인지 사회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고등학교 다닐 때 태백 지역을 휩쓸고 돌아다닌 전력이 있어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내 고향이 아닌 강원도 태백 시에 있는 대한석탄공사 장성 광업소에 취직이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석유산업보다는 석탄산업이 기간산업이었다. 국영 기업체인 대한 석탄공사 장성 광업소는 5,000명 광부들의 가족을 위해 나라에서 허가를 받아 극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지역에서 꽤 유명했던 나는 후배들의 도움으로 장성 극장 사업부장이 되어 극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서울 충무로에 있는 영화사에 올라가, 우리 극장의 한 달분 영화를 계약하고 쇼단의 일정을 계약하는 것이 주로 내가 하는 일이었다. 극장에서 이틀마다 한 번씩 교대해 상영하는 필름과 쇼단을 섭외할 때 가수라든가 배우라든가 꼭 함께 와야 한다는 조건을 걸어 계약을 해야 했으므로 당시 각 극장에는 그런 일을 처리할 건달 사업부장들이 한 사람씩 배치되어 있었다.
좋은 영화가 나오면 하나뿐인 강원도 판권의 필름을 다른 여러 경쟁 극장에 뺏기지 않고 먼저 계약하여 상영하는 것은 사업부장의 실력에 달려 있었으며 극장의 수입과 직결되어 있었다. 나는 이런 일에 아주 적역이었다. 돈으로…… 술로…… 공갈 협박으로……, 아니면 주먹으로……. 당시 나는 이 모든 요건을 갖춘 특수부대 북파요원 출신이 아니었던가.
자연히 나는 매일 명동이나 충무로 영화사가 밀집해 있는 다방이나 술집 등 유흥가를 찾아다녔고 영화사 사장들이나 실무자들과 밤새 어울리며 술에 찌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오면 역시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이나 후배들과 어울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술집들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때만 해도 극장이라는 곳은 지방 건달들이 모이는 소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방 극장에 앉아 있으면 후배들이 “형님! 형님” 하면서 몰려들었다. 특수부대에서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이런 생활이 전연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더 재미있고 즐겁기만 했다. 가끔 이런 생활을 청산해야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그 생활이 편하고 익숙했다. 빠져나오기에는 너무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아내와 결혼할 때 다시는 이런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여전히 나는 술집에 파묻혀 지냈으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조금도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내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아내는 대한석탄공사 장성 광업소에 속해 있는 장성 의료원 병동의 수간호사였다. 당시 장성 의료원은 아주 큰 병원이었다. 50여 명의 간호사들이 있었으며 병동 수간호사로 일하는 아내의 너그러운 마음에 반해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다.
막상 결혼을 했지만 나는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했다. 큰애를 낳고, 둘째를 낳고, 이제는 마음을 잡을 법도 한데 나는 쉽게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내는 험한 세계에서 빠져나오고 싶어하는 남편을 돕고 싶어 몸부림을 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내는 어떻게든 악한 환경에서 벗어나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아내는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그날은 둘째아이의 돌날이었다. 서독 간호사로 선발된 아내는 매정하게 남편과 두 아이들을 뒤로하고 먼 훗날을 기약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보겠다는 꿈과 어떻게든 남편을 건달 세계에서 빼내겠다는 집념이 그녀를 서독으로 보낸 것이다.
착실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해도 아침이면 “형님, 접니다” 하면서 후배들이 몰려오는 일이 끊이지 않았고, 한번 후배들과 나가면 이튿날 새벽녘에야 술에 찌들어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오는 남편을 바라봐야 했으니, 아내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아내를 독일로 떠나보내고 난 후, 이번에는 정말 착실하게 제대로 살아 보겠다고 마음을 다져먹었다. 그런데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하나 작은 것부터 실천해 나가기 시작했다.
남편을 위해 세상에 나온지 1년쩨 돌 된 어린 아기를 두고 멀리 서독으로 떠나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사랑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써서 보냈다. 술집 여자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집으로 일찍 돌아왔다는 둥 오늘은 술을 먹지 않았다는 둥……. 아내를 생각하며 유혹의 세계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나 스스로도 대견스러웠다.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 형식으로 편지를 써서 부쳤다. 아내 또한 매일 답장을 보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