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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파"<24>깡패중대김상사시대는가고
김**
|Views 661
|200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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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중대 김 상사의 시대는 가고…
포항 대보의 사고로 인한 후유증은 컸다.
가까운 이웃이나 동료 또는 후배들에게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었다.
대충 간단하게 짐을 챙겨 신설되는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30관제경보전대 제주대대로 발령을 받고 쫓기다시피 포항 대보를 떠났다.
명색이 25명의 헌병을 거느린 헌병대장이었기에 나는 가짜 중사 계급장을 달고 제주도에 갔다.이미 내가 온다는 소문을 들은 헌병들은 어찌나 나를 두려워하는지 통 나와 눈을 마주치지를 않았다.
사실 나는 강한 자에게는 무섭고 약한 자에게는 인정을 베푸는 사람인데 말이다. 다만 감찰감 출신인 P소령님은 내 소문을 다 듣고 ‘너 한번 맛 좀 봐라’는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부대에 도착해서 신고할 때부터 기죽이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김 중사! 오늘부터 네 버릇을 내가 고치겠다.
네가 깡패중대 김 상사란 별명을 가진 못된 놈이란 소문은 이미 다 들었다.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막 노는 모양인데 나한테는 어림없는 이야기다. 네가 비록 헌병대장이지만 여기는 군인 사회다. 내 부하이기에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너는 앞으로 헌병이니 권총은 차되 실탄은 장전 못하며 탄창은 항상 비어 있어야 하며, 시내로 외출할 때는 나에게 허락을 받고 나가야 한다.”
야! 이거 진짜 임자 만난다더니 정말 임자를 만난 셈이다. 듣다 듣다 참을 수 없어 한 마디 했다.
“아니 P소령님! 여기가 무슨 논산 훈련소인 줄 아십니까?”
그리고는 경례를 하고 그냥 뛰쳐나와 버렸다.
그날 이후 P소령은 나를 만날 때마다 무조건 옆구리에 차고 있는 권총 탄창 구멍에 손을 넣어 보고는 총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빙긋이 웃고 지나갔다.
나는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25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헌병대장인데 말이다.
어린아이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깡패중대 김 상사의 기질을 고쳐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의도는 고맙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지 않은가?
나는 가능하면 부대장인 P소령과 부딪치지 않기로 했다. 나 자신도 내가 언제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고 사고를 칠지 몰라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헌병대는 당시 미공군 관제부대 헌병대와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었는데, 미군이 전출을 가게 되면 한국 공군들에게 모든 부서를 인계해 주고 떠났다. 그래서 그들이 쓰던 사물함이나 옷장들은 모두 내가 인계를 받았고, 우리 헌병대 콘세트에는 말단 헌병이라도 모두 미군들이 주고 간 멋진 옷을 걸어 두는 개인 옷장들이 다 있었다.
대원들은 헌병대 내무반 콘세트 끝부분에 내 개인 침실을 아방궁같이 만들어 주었다. 헌병들은 내가 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울타리 없이 평화롭게 사는 제주 시민들의 집뜰을 눈여겨보았다가 시내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집뜰에 진열해 둔 화분을 들고 들어와 내 방을 장식해 놓고 함께 즐기곤 했다.
그뿐이랴. 당시 고급 품목으로 구하기 어려운 대형 제니스 라디오까지 구해 왔다.
이렇듯 즐거운 시간들이 마냥 흘러가던 어느 날
드디어 일은 터지고 말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 사실을 보고받은 부대장이 직접 헌병대 콘세트에 와서 확인을 하고 간 것이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었다. 부대장실 근처를 지나는데 많은 군인들과 장교들 앞에서 P소령이 “헌병대장 김 중사!” 하고 불러 세웠다. 나는 무슨 영문인 줄 모르고 앞에 가 섰다. P소령은 또 예외 없이 내 권총 탄창에 손가락을 찔러 보고는 다짜고짜 헌병대 내무반에 옷장이 많으니 열 개만 빼서 다른 병과 내무반장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라고 했다.
나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부하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명령이야! 빨리 나누어줘라.”
대답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 명령 못 지키겠습니다.”
많은 군인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P소령은 “뭐야! 명령에 불복종?” 하면서 내 따귀를 세차게 갈겼다. 느닷없이 한 대 얻어맞고 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도 발작하듯 달려들려고 하자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면서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용감하게 따라들어갔다.
이윽고 방 안에서 두 사람이 붙었다. 난장판이 되었다. 많은 장교들이 뜯어말려 무사히 진압은 되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막상 일이 커지자 부대장도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씩씩거리는 나를 앞에 앉혀 놓고 말리던 장교들을 다 내보냈다. 그리고 우리 둘이 어떻게 수습할지 의논하자고 했다.
“왜? 사람되려고 노력하는데 왜 자꾸 괴롭히는 거요?”
안타까운 마음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는 정말 살고 싶었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환경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잠시 후 이제는 올 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담담해졌다. 어차피 육군 형무소로 갈 바엔 멋있게 가자고 생각했다.
드디어 부대장이 입을 열었다. 결론은 나를 일단 감옥에 보내야겠으며 감옥에 있는 동안 빨리 석방될 수 있도록 계속 손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도 감정을 섞어 말했다.
“언젠가 감옥에서 나오면 꼭 당신을 찾겠소……. 나는 죽어도 울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내와 자식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내무반 콘세트로 돌아와 보니, 내 소식을 들은 헌병들이 불안한 마음들을 감추지 못한 채 내무반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나는 벌러덩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동안의 인생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결국 내가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대로 굵고 짧게 인생이 끝나는가 보다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이상한 감촉에 눈을 떴다. 내 침대 곁에 부관인 박병효 중위(훗날 고등고시에 합격해 경찰총경을 거처 신민당 여수․순천 지역 국회의원을 지내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심)가 와 있었다. 지금 부대장님께서 장교 모두와 함께 파티를 열었는데 나를 꼭 참석시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만약 같이 안 가면 자기가 기합을 받으니 꼭 같이 가자고 했다.
당시 박 중위는 군대생활을 하면서 고등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커피도 날라 주고 꽤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내키지 않는 것을 박 중위 때문에 참석해 보니, 그 파티는 나를 위로하기 위한 파티였다.
그날 이후 부대장님이 얼마나 잘해 주던지……, 그러나 그동안 이 사건 때문에 오산에 있는 본부 감찰감이 내려왔다 가셨고, 드디어 오산 30전대 헌병 대대장님도 다녀가셨다. 그런데 한결같이 왜 근무 헌병을 때리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신이 났다. 그러나 사고 후 2주 만에 갑작스럽게 도착한 군용기에 간단한 짐을 챙겨 아무도 모르게 헌병대장님에게 전하는 편지 한 장을 들고 오산 본부 헌병대로 올라왔다. 이유는 내가 제주도에 있는한 군기율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편지를 받아 본 본부 김철수 헌병대장님은 “누가 우리 헌병을 함부로 건드려!” 하시면서 내가 전해 드린 편지를 좍좍 찢어 버렸다. 정말 은인과 같은 고마운 분이었다. 그리고 제주도의 P부대장님도 나에게는 은인과 같은 분이다. 얼마든지 감옥에 갈 뻔했는데도 사랑으로 감싸주신 분이기에 사회에 나온 뒤에도 자주 찾아뵈었다. 별을 하나 단 준장으로 예편해 큰 기업에서 부사장으로 근무할 때는 내가 목사가 된 것을 축하해 주시기도 했다.
헌병대장님께서 내게 물었다.
“네가 원하는 곳이 어디냐?”
“내 고향이 가까운 강릉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꼭 제대를 시켜 주십시오.”
나는 곧 강릉 헌병대로 가게 되었고 이후 조용히 지냈다. 그리고 군대생활 5년 6개월 만에 아슬아슬하게 명예 제대를 하고 드디어 사회로 나오게 되었다.
사실, 나를 아는 모든 분들에게 나의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면 한결같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1996년 내가 한국에서 ‘유럽․서울 사랑의 불꽃(ESGL)’이란 프로그램을 주관했을 때 그 모든 일들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사랑의 불꽃 세미나에는 첫 적지에 침투했을 당시 파견대장이었던 중정 출신 예비역 Y대령과 서울 오산고등학교 J교장 선생님(예비역 육군소장 출신)도 함께했는데, 세미나가 끝나고 은혜를 받은 Y대령이 나에 대한 간증을 하면서 내가 군대에서 겪은 일들을 소상하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군대시절 이야기는 내 아이들에게도 자주 들려주었다. 밥상 앞에서 아이들에게 군대시절 무용담을 신나게 이야기하면 다들 신이 나서 밥숟갈도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유일하게 아내만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귀를 틀어막곤 했다. 군대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 귀가 따갑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목사가 된 이후에는 군대시절 이야기를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87년도 우리 부부가 독일 선교사로 파송되어 나갔을 때 당시 어렸던 막내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육군 공수부대 직업군인으로 입대를 해서 군대 안에서 대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가 보다.
깡패중대 김 상사의 시대는 가고…
포항 대보의 사고로 인한 후유증은 컸다.
가까운 이웃이나 동료 또는 후배들에게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었다.
대충 간단하게 짐을 챙겨 신설되는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30관제경보전대 제주대대로 발령을 받고 쫓기다시피 포항 대보를 떠났다.
명색이 25명의 헌병을 거느린 헌병대장이었기에 나는 가짜 중사 계급장을 달고 제주도에 갔다.이미 내가 온다는 소문을 들은 헌병들은 어찌나 나를 두려워하는지 통 나와 눈을 마주치지를 않았다.
사실 나는 강한 자에게는 무섭고 약한 자에게는 인정을 베푸는 사람인데 말이다. 다만 감찰감 출신인 P소령님은 내 소문을 다 듣고 ‘너 한번 맛 좀 봐라’는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부대에 도착해서 신고할 때부터 기죽이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김 중사! 오늘부터 네 버릇을 내가 고치겠다.
네가 깡패중대 김 상사란 별명을 가진 못된 놈이란 소문은 이미 다 들었다.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막 노는 모양인데 나한테는 어림없는 이야기다. 네가 비록 헌병대장이지만 여기는 군인 사회다. 내 부하이기에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너는 앞으로 헌병이니 권총은 차되 실탄은 장전 못하며 탄창은 항상 비어 있어야 하며, 시내로 외출할 때는 나에게 허락을 받고 나가야 한다.”
야! 이거 진짜 임자 만난다더니 정말 임자를 만난 셈이다. 듣다 듣다 참을 수 없어 한 마디 했다.
“아니 P소령님! 여기가 무슨 논산 훈련소인 줄 아십니까?”
그리고는 경례를 하고 그냥 뛰쳐나와 버렸다.
그날 이후 P소령은 나를 만날 때마다 무조건 옆구리에 차고 있는 권총 탄창 구멍에 손을 넣어 보고는 총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빙긋이 웃고 지나갔다.
나는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25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는 헌병대장인데 말이다.
어린아이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깡패중대 김 상사의 기질을 고쳐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의도는 고맙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지 않은가?
나는 가능하면 부대장인 P소령과 부딪치지 않기로 했다. 나 자신도 내가 언제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고 사고를 칠지 몰라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헌병대는 당시 미공군 관제부대 헌병대와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었는데, 미군이 전출을 가게 되면 한국 공군들에게 모든 부서를 인계해 주고 떠났다. 그래서 그들이 쓰던 사물함이나 옷장들은 모두 내가 인계를 받았고, 우리 헌병대 콘세트에는 말단 헌병이라도 모두 미군들이 주고 간 멋진 옷을 걸어 두는 개인 옷장들이 다 있었다.
대원들은 헌병대 내무반 콘세트 끝부분에 내 개인 침실을 아방궁같이 만들어 주었다. 헌병들은 내가 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울타리 없이 평화롭게 사는 제주 시민들의 집뜰을 눈여겨보았다가 시내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집뜰에 진열해 둔 화분을 들고 들어와 내 방을 장식해 놓고 함께 즐기곤 했다.
그뿐이랴. 당시 고급 품목으로 구하기 어려운 대형 제니스 라디오까지 구해 왔다.
이렇듯 즐거운 시간들이 마냥 흘러가던 어느 날
드디어 일은 터지고 말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 사실을 보고받은 부대장이 직접 헌병대 콘세트에 와서 확인을 하고 간 것이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었다. 부대장실 근처를 지나는데 많은 군인들과 장교들 앞에서 P소령이 “헌병대장 김 중사!” 하고 불러 세웠다. 나는 무슨 영문인 줄 모르고 앞에 가 섰다. P소령은 또 예외 없이 내 권총 탄창에 손가락을 찔러 보고는 다짜고짜 헌병대 내무반에 옷장이 많으니 열 개만 빼서 다른 병과 내무반장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라고 했다.
나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부하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명령이야! 빨리 나누어줘라.”
대답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 명령 못 지키겠습니다.”
많은 군인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P소령은 “뭐야! 명령에 불복종?” 하면서 내 따귀를 세차게 갈겼다. 느닷없이 한 대 얻어맞고 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도 발작하듯 달려들려고 하자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면서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용감하게 따라들어갔다.
이윽고 방 안에서 두 사람이 붙었다. 난장판이 되었다. 많은 장교들이 뜯어말려 무사히 진압은 되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막상 일이 커지자 부대장도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씩씩거리는 나를 앞에 앉혀 놓고 말리던 장교들을 다 내보냈다. 그리고 우리 둘이 어떻게 수습할지 의논하자고 했다.
“왜? 사람되려고 노력하는데 왜 자꾸 괴롭히는 거요?”
안타까운 마음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는 정말 살고 싶었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데 환경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잠시 후 이제는 올 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담담해졌다. 어차피 육군 형무소로 갈 바엔 멋있게 가자고 생각했다.
드디어 부대장이 입을 열었다. 결론은 나를 일단 감옥에 보내야겠으며 감옥에 있는 동안 빨리 석방될 수 있도록 계속 손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도 감정을 섞어 말했다.
“언젠가 감옥에서 나오면 꼭 당신을 찾겠소……. 나는 죽어도 울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내와 자식이 있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내무반 콘세트로 돌아와 보니, 내 소식을 들은 헌병들이 불안한 마음들을 감추지 못한 채 내무반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나는 벌러덩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동안의 인생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결국 내가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대로 굵고 짧게 인생이 끝나는가 보다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이상한 감촉에 눈을 떴다. 내 침대 곁에 부관인 박병효 중위(훗날 고등고시에 합격해 경찰총경을 거처 신민당 여수․순천 지역 국회의원을 지내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심)가 와 있었다. 지금 부대장님께서 장교 모두와 함께 파티를 열었는데 나를 꼭 참석시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만약 같이 안 가면 자기가 기합을 받으니 꼭 같이 가자고 했다.
당시 박 중위는 군대생활을 하면서 고등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커피도 날라 주고 꽤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내키지 않는 것을 박 중위 때문에 참석해 보니, 그 파티는 나를 위로하기 위한 파티였다.
그날 이후 부대장님이 얼마나 잘해 주던지……, 그러나 그동안 이 사건 때문에 오산에 있는 본부 감찰감이 내려왔다 가셨고, 드디어 오산 30전대 헌병 대대장님도 다녀가셨다. 그런데 한결같이 왜 근무 헌병을 때리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신이 났다. 그러나 사고 후 2주 만에 갑작스럽게 도착한 군용기에 간단한 짐을 챙겨 아무도 모르게 헌병대장님에게 전하는 편지 한 장을 들고 오산 본부 헌병대로 올라왔다. 이유는 내가 제주도에 있는한 군기율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편지를 받아 본 본부 김철수 헌병대장님은 “누가 우리 헌병을 함부로 건드려!” 하시면서 내가 전해 드린 편지를 좍좍 찢어 버렸다. 정말 은인과 같은 고마운 분이었다. 그리고 제주도의 P부대장님도 나에게는 은인과 같은 분이다. 얼마든지 감옥에 갈 뻔했는데도 사랑으로 감싸주신 분이기에 사회에 나온 뒤에도 자주 찾아뵈었다. 별을 하나 단 준장으로 예편해 큰 기업에서 부사장으로 근무할 때는 내가 목사가 된 것을 축하해 주시기도 했다.
헌병대장님께서 내게 물었다.
“네가 원하는 곳이 어디냐?”
“내 고향이 가까운 강릉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꼭 제대를 시켜 주십시오.”
나는 곧 강릉 헌병대로 가게 되었고 이후 조용히 지냈다. 그리고 군대생활 5년 6개월 만에 아슬아슬하게 명예 제대를 하고 드디어 사회로 나오게 되었다.
사실, 나를 아는 모든 분들에게 나의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면 한결같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1996년 내가 한국에서 ‘유럽․서울 사랑의 불꽃(ESGL)’이란 프로그램을 주관했을 때 그 모든 일들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사랑의 불꽃 세미나에는 첫 적지에 침투했을 당시 파견대장이었던 중정 출신 예비역 Y대령과 서울 오산고등학교 J교장 선생님(예비역 육군소장 출신)도 함께했는데, 세미나가 끝나고 은혜를 받은 Y대령이 나에 대한 간증을 하면서 내가 군대에서 겪은 일들을 소상하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군대시절 이야기는 내 아이들에게도 자주 들려주었다. 밥상 앞에서 아이들에게 군대시절 무용담을 신나게 이야기하면 다들 신이 나서 밥숟갈도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유일하게 아내만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귀를 틀어막곤 했다. 군대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 귀가 따갑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목사가 된 이후에는 군대시절 이야기를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87년도 우리 부부가 독일 선교사로 파송되어 나갔을 때 당시 어렸던 막내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육군 공수부대 직업군인으로 입대를 해서 군대 안에서 대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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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우석 2005.07.17 00:40:41 삭제김태원 대선배님!
선배님의 생생한 경험담은 잘 읽고 있습니다.
선배님과 같은분을 선배님으로 부를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바쁘신 목회활동중에서도 이렇게 후배들을 격려 하여
주심에 더욱 감사드립니다.
저는 병355기로 강릉18전비에서 정비병으로 근무하고
현재는 인천에서 거주하고 있는 손우석 입니다.
늘 감사드리며 선배님의 가정과 선배님이 하시는 주님의 사역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 합니다.
건강 하십시요.
병355기 손우석 올림 -
김태원 2005.07.10 04:58:54 삭제조동열후배님
정말 반갑습니다.
작년 출판기념회때는 고마웠읍니다.
다행히 박인희후배님의 배려로 로카피스회원 사진앨범을 통해서
후배님 모습을 볼수 있어서 금방 알겠군요.
앞에서 일하는것도 쉬운일이 아닙니다.
사다리회를 이끌고 가시는데 기도로 돕겠읍니다.
저를 위해서도 늘상 기도와 힘을 실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사랑합니다.
병33기출신 김태원 목사 드림 -
조동열 2005.07.09 13:16:24 삭제김태원 대선배님 반갑습니다. 작년 잠실롯테에서 출판기념일에 뵈옵고
자주 인사드리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바쁘신 목회활동에도 이렇게 후진들을 위해 좋은 군경험담을
쓰시는 선배님의 열정에 늘 감사드립니다.
저는 로카피스 사다리회 방장을 맡고 있는 병 148기 조 동 열 입니다.
언제 읽어도 선배님의 글은 우리공군에도 이런 부대도 있었나 하고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사답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군인다운 용맹성은 떨어진다는 공군에 이런 용맹하고 강인한 부대와
군인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귀중한 史料입니다.
늘 감사드리고 선배님의 건강과 행복과 하나님의 은총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다리회 방장 조 동 열 올림
공식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