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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이야기
"북파"<17>실미도교육대장김순웅상사
김**
|Views 837
|200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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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교육대장 김순웅 상사를 그리워하며
김순웅 상사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옛 추억이 되살아난다. 오류동에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덧고개 육군 특수부대 습격 사건’이 그것이다.
지금이야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여러곳이 있지마는 50년대에는 기껏 인천, 부평, 소사, 오류동, 영등포,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로 가는 국도 하나밖에 없었다. 영등포와 서울을 오가는 전차들이 한강을 한가롭게 건너다니던 시절, 나는 멋을 부리느라 모시바지 저고리 속에 권총을 차고(밖에서 봐도 권총이 보이게 했음) 부채 하나를 쥐고 여름에 종로거리를 어슬렁어슬렁 활보하면서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고 설쳐댔다.
스물네 살 젊디젊은 나이에 나는 항상 부채를 들고 다녔다. 모시바지 저고리에는 부채가 어울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의기양양했던지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지프든 민간인 자동차든 모두 내 자가용 같았다. 들고 있던 부채를 땅 밑을 향하게 해 정지 신호를 보내면 지프나 일반 자동차가 내 앞에 ‘찍’ 하고 정지하던, 특수부대원이라면 꼼짝을 못하던 암울한 시대였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고된 훈련으로 특수부대원 30명 모두 피곤에 지쳐 깊이 잠들어 있던 어느 날 느닷없이 비상이 걸렸다.
새벽 2시…….
몇 시간 전에 우리 대장 김종걸 대위가 인근 덧고개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 특수부대원들에게 술집에서 망신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특수부대는 중대 병력인데 바로 덧고개(오류동에서 영등포 방면으로 약 500미터 지점에 있는 곳으로 후에 그 건물이 낙하산 교육장이 되었음)에 주둔하고 있었다.그동안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았던 실력들을 써먹지 못해 모두 몸이 근질근질해 있던 참이라 ‘이때다!’ 하고 눈을 부라리면서 덧고개를 향해 달려갔다. 물론 총, 칼,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먼저 보초를 서고 있는 위병소를 제압했다. 그리고 고요히 잠들어 있는 각 내무반을 향해 동작이 제일 빨랐던 김순웅 상사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비상!”
“비상!”
“삣쌍!”
이미 전등불을 모두 부셔 버려 각 내무반과 복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비상!” 이라는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옷을 주워 들고 나오는 대원들을 무조건 문 앞에서 나오는 순서대로 박살을 내기 시작해 삽시간에 온 부대를 평정해 버렸다. 100여 명의 부대원들을 완전히 초주검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을 두고 아비규환이라고 하는 것인가? 흡사 전쟁터와 같은 아비규환…….
먼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새벽,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 연락이 되였는지 육군헌병 백차와 육군병원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달려와 수십 명의 환자들을 싣고 갔다. 우리는 큰 작전이라도 성공한 것처럼 대오를 지어 의기양양하게 군가까지 부르면서 부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드디어 올 것이 와 버렸다. 우리는 모두 쫓기다시피 개봉동(첩보부대 뒷산 계곡)으로 갔다. 천막으로 가건물을 세우고 삼엄한 경비 속에서 한 달간 외출 금지를 당한 채 죽을 만큼 혹독한 훈련과 기합을 받아야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날 밤 난동으로 많은 군인들이 희생을 당했다고 했다. 비록 총이나 칼, 몽둥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잠자다가 졸지에 손 한 번 못 써보고 당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생겼겠는가? 우리는 모두 일당백으로 훈련받은 북파 요원들 아니던가.
여기에 책임을 물어 많은 상급자와 부대원 모두 희생을 치를 뻔했는데, 부대의 특수성 때문에 높은 분들 몇몇만 희생을 당했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은 모두 군사기밀이기에 쉬쉬하는 가운데, 사고를 친 우리는 모두 적지에 침투한 걸로 하기 위해 한 달간 외출을 금지하고 개봉동으로 격리시켰던 것이다.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나 육군부대와의 마찰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그 부대는 그곳에 온 지 한 달 만에 결국 다른 지역으로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 낙하산 교육대가 들어선 것이다.
아마 1960년대에 서울 인천간 기차를 타고 다녔던 후배님들은 기억할 것이다. 오류역을 500미터 앞에 두고 오른쪽 편에 낙하산 점프 훈련장이 있었다. 오류역 왼쪽 여러 곳에 서치라이트로 감싸 있던 산 속이 2325부대 본부이며 산등성이에 몇 개의 안테나가 있는 곳이 통신소였다.
지금도 훈련을 받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날쌘 제비같이 설치던, 실미도에서 허망하게 당했던 김순웅 상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그를 잊지 못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 그는 나를 친형처럼 따랐다. 우리는 유행이랍시고 바지 가랑이가 다리에 딱 붙는 맘보 바지 스타일로 군복을 입고 다녔으며, 항상 바지 밑에서부터 세 겹 정도를 겹쳐 올려 입고 다녔다. 그때 순웅이도 내 바지폼이 멋있다고 나처럼 바지를 겹쳐 입었다. 우리는 상급자들로부터 지적을 당하면서도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실미도 교육대장 김순웅 상사를 그리워하며
김순웅 상사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옛 추억이 되살아난다. 오류동에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덧고개 육군 특수부대 습격 사건’이 그것이다.
지금이야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여러곳이 있지마는 50년대에는 기껏 인천, 부평, 소사, 오류동, 영등포,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로 가는 국도 하나밖에 없었다. 영등포와 서울을 오가는 전차들이 한강을 한가롭게 건너다니던 시절, 나는 멋을 부리느라 모시바지 저고리 속에 권총을 차고(밖에서 봐도 권총이 보이게 했음) 부채 하나를 쥐고 여름에 종로거리를 어슬렁어슬렁 활보하면서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고 설쳐댔다.
스물네 살 젊디젊은 나이에 나는 항상 부채를 들고 다녔다. 모시바지 저고리에는 부채가 어울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의기양양했던지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지프든 민간인 자동차든 모두 내 자가용 같았다. 들고 있던 부채를 땅 밑을 향하게 해 정지 신호를 보내면 지프나 일반 자동차가 내 앞에 ‘찍’ 하고 정지하던, 특수부대원이라면 꼼짝을 못하던 암울한 시대였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고된 훈련으로 특수부대원 30명 모두 피곤에 지쳐 깊이 잠들어 있던 어느 날 느닷없이 비상이 걸렸다.
새벽 2시…….
몇 시간 전에 우리 대장 김종걸 대위가 인근 덧고개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 특수부대원들에게 술집에서 망신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특수부대는 중대 병력인데 바로 덧고개(오류동에서 영등포 방면으로 약 500미터 지점에 있는 곳으로 후에 그 건물이 낙하산 교육장이 되었음)에 주둔하고 있었다.그동안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았던 실력들을 써먹지 못해 모두 몸이 근질근질해 있던 참이라 ‘이때다!’ 하고 눈을 부라리면서 덧고개를 향해 달려갔다. 물론 총, 칼,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먼저 보초를 서고 있는 위병소를 제압했다. 그리고 고요히 잠들어 있는 각 내무반을 향해 동작이 제일 빨랐던 김순웅 상사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비상!”
“비상!”
“삣쌍!”
이미 전등불을 모두 부셔 버려 각 내무반과 복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비상!” 이라는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옷을 주워 들고 나오는 대원들을 무조건 문 앞에서 나오는 순서대로 박살을 내기 시작해 삽시간에 온 부대를 평정해 버렸다. 100여 명의 부대원들을 완전히 초주검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을 두고 아비규환이라고 하는 것인가? 흡사 전쟁터와 같은 아비규환…….
먼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새벽,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떻게 연락이 되였는지 육군헌병 백차와 육군병원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달려와 수십 명의 환자들을 싣고 갔다. 우리는 큰 작전이라도 성공한 것처럼 대오를 지어 의기양양하게 군가까지 부르면서 부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드디어 올 것이 와 버렸다. 우리는 모두 쫓기다시피 개봉동(첩보부대 뒷산 계곡)으로 갔다. 천막으로 가건물을 세우고 삼엄한 경비 속에서 한 달간 외출 금지를 당한 채 죽을 만큼 혹독한 훈련과 기합을 받아야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날 밤 난동으로 많은 군인들이 희생을 당했다고 했다. 비록 총이나 칼, 몽둥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잠자다가 졸지에 손 한 번 못 써보고 당했으니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생겼겠는가? 우리는 모두 일당백으로 훈련받은 북파 요원들 아니던가.
여기에 책임을 물어 많은 상급자와 부대원 모두 희생을 치를 뻔했는데, 부대의 특수성 때문에 높은 분들 몇몇만 희생을 당했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은 모두 군사기밀이기에 쉬쉬하는 가운데, 사고를 친 우리는 모두 적지에 침투한 걸로 하기 위해 한 달간 외출을 금지하고 개봉동으로 격리시켰던 것이다.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나 육군부대와의 마찰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그 부대는 그곳에 온 지 한 달 만에 결국 다른 지역으로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 낙하산 교육대가 들어선 것이다.
아마 1960년대에 서울 인천간 기차를 타고 다녔던 후배님들은 기억할 것이다. 오류역을 500미터 앞에 두고 오른쪽 편에 낙하산 점프 훈련장이 있었다. 오류역 왼쪽 여러 곳에 서치라이트로 감싸 있던 산 속이 2325부대 본부이며 산등성이에 몇 개의 안테나가 있는 곳이 통신소였다.
지금도 훈련을 받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날쌘 제비같이 설치던, 실미도에서 허망하게 당했던 김순웅 상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그를 잊지 못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 그는 나를 친형처럼 따랐다. 우리는 유행이랍시고 바지 가랑이가 다리에 딱 붙는 맘보 바지 스타일로 군복을 입고 다녔으며, 항상 바지 밑에서부터 세 겹 정도를 겹쳐 올려 입고 다녔다. 그때 순웅이도 내 바지폼이 멋있다고 나처럼 바지를 겹쳐 입었다. 우리는 상급자들로부터 지적을 당하면서도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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